한국 차(茶 Tea) 이야기

소품집

우리나라 차의 유래는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승려들을 통해서 전해졌다는 중국 유래설과, 김수로왕의 부인이엇던

허씨가 지금의 인도인 아유타국에서 씨를 들고 온 거이라 여기는 인도 유래설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 흥덕왕 때 당 문종에게서 선물로 받은 차나무 씨앗을 지리산에 심었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신라 선덕여왕이 차를 즐겨 마셨고 문무왕은 예불시 헌다를 지시하고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설총은 신문왕에게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AD 828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흥덕왕이 지리산 근처에 파종을 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지방에서 차가 자라면서부터 음다풍속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도 지리산 남쪽의 화개와 보성 지역들이 차의 주산지가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널리 쓰일만큼 고려시대까지 차문화가 번성했으며 대부분 귀족과 승려층에서 소비되었다.

신라를 이은 고려왕조(918-1392)는 불교국가였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차문화 역시 꽃을 피운 시대였으며 차는 왕의 시혜품으로, 예불을 비롯한 국가의 공식행사에서의 진상품으로 널리 쓰였다.

 

차선일체(茶禪一体)란 말 그대로 차는 선의 정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각성작용 때문에 수행중인 승려들에게 필수품으로 애용되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시중에 다원(여관)과 다점(다방)들이 운영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차에 상표나 부르는 이름이 생겼으며 차가 생산되는 지역에서는 다세제도가 생겨 일정한 수준의 차를 세금으로 걷고 등급을 붙었는데 눈이 내릴 때 들짐승을 피해 산에 올라가서 싹을 따서 여러차례 수작업을 거쳐서 진상해야하는 물건인 만큼 주민들이 차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사태가 벌어져 이규보 이제현등의 당대 문신들로부터 상소가 빈번히 올라간 기록이 있다.

주민들은 산에 들어가 차나무를 없애서 차를 생산하지 않거나 차농사를 짓고 나머지 농사는 망치는일이 벌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국가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차문화 역시 쇠퇴하였다.

유교사상에 의해 생활이 검소해짐에 따라 다도가 쇠퇴했지만 역시 승려들 사이에서 명맥이 이어져 왔다.

 

조선 초기에는 이행·서거정·김시습·김종직 등에 의해 고려의 음다 유풍이 계승되었다.

궁중에서도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차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중기까지도 차를 아는 문인들이 가끔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경에는 음다의 풍이 쇠퇴하고 차에 대한 이해가 적어져 궁중에서까지도 차를 제대로 마시지 않은 것 같다.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에게 “귀국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아니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 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차와 선(禪)을 하나로 생각한 대흥사 초의선사에 의해 다도는 크게 부흥했으며, 그와 교분을 가졌던 정약용이나 김정희 등 선비들도 차에 심취했었다.

차에 대한 과중한 세금부과는 차 농사를 기피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특히 일본의 한국침략으로부터 비롯된 7년 전쟁(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의 국토와 민생을 황폐화시켰으며 전쟁 중에 한국의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납치되어가면서 도자기문화와 함께 차문화도 한동안 실종되고 말았다. 후세 사가들이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리산 일대를 따라 조성되었던 녹차 산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일대의 지주였던 양반가가 몰락하고 당장 먹을 것이 귀해지면서 차나무를 방치하게 되는 한편, 일본인들이 보성과 광주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녹차농장을 한국에 조성하려 했기 때문이다.해방 후 국가에서 해당 토지를 환수하여 일제 강점기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됨에 따라 원래 지주의 손에 돌아가게 된다. 전란 후에는 주로 차를 만들던 사찰을 중심으로 해당 지역 농민들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거나 차밭을 일구는 형태로 해당 지역 기간산업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져서 이후 새로운 다원들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한국의 녹차밭은 운남 소엽종이 토착화한 재래종과 일본 시즈오카에서 유래한 대엽종인 야부기다종이 재배가 시작된 시점에 따라 서로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보성, 광주 일대와 서귀포 부근에 있는 조성된 차밭은 야부기다종이, 지리산 남쪽을 따라서 경남 일대 산야에는 재래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일정하지는 않다. 최근에 대단위로 조성이 된 제주 녹차의 경우 후슌 야부기다종이 주로 심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부터 고등여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가 교육되었는데, 1940년대에는 47개 여자고등학교와 상당수의 여자전문학교에서 교습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다도교육은 일본의 다도를 우리 나라에 옮기려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새로이 일기 시작했던 차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면서 발전하고 있다.

허백련(許百鍊)과 최범술(崔凡述)은 최근 우리 나라의 다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차(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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